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에 대하여 한 줄 전집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에 대하여

 

 

세상에 자기소개서 만큼 기호적인 것이 있을까. *토마스 세벅(Thomas Sebeok·1920~2001)에 따르면 기호학의 근원은 고대 의사 갈레누스의 징후(symtom)해석학에서 기원하는 것이라는데, 이 말이 옳다면 말이다. 자신의 몸을 열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미래의 타인에게 요구하는 혹은 욕망하는 어떠한 물적 체계, 즉 기호와는 완전히 반대로 자기소개서는 작동한다.

 

자기소개서는 최대한 자신을 닫고 싸매서 과거부터 있어왔던 타인에게 자신이 어떠한 선물일 수 있는지를 공개하는 것이다. 자기소개서에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간파하여, 자신을 그 타인이 욕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문학가가 이러한 반기호를 욕망한다면 나는 그를 폐기물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것이다.

 

우습게도 가장 완벽한 자기소개서에 묘사된 사람은, 사실 그 소개서의 수신처를 가장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완벽하게 수신처가 요구하는 덕성의 핵심까지 파악했고, 심지어 여러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나아질 것인지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그가, 굳이 그곳에 등록되어서 더 무엇을 얻겠는가. 잘 쓴 자기소개서의 그는 자기소개서에서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암시할 수 있다. 자신은 오직 그곳에서 금전적 이득이나 그에 상응하는 등속만을 얻어갈 것이기에, 당신네들이 나에게서 축출해갈 것이 그 이상으로 훨씬 크고도 많다.

 

사태가 이 정도만 되더라도, 우리는 세상에 억지 웃음이라도 지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수신처는 기호도 반기호도, 신호도 반신호도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을 자기성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동 기계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바인가. 그곳은 권력기계가 자신에 부역한 사람들에게 수당으로 자리를 할당하기 위해 만든 회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미 권력기계에게 충분히 봉토를 받아오신 분들만이 하해같은 은해로 자신의 봉토에 농노가 될 준비가 충분히 된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하사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반기호일까.

 

나는 에세이를 잘 쓴다. 내가 쓰고 싶어하는 시도, 소설도, 희곡도 모두다 잘 못 쓸 뿐더러, 잘못 쓰지만, 그렇다. 내 인생의 요목마다 그 재주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에세이에서는 반전을 위한 이러한 포석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찌보면 가장 에세이 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자기소개서 쓰기에서는 패배를 맛본 역사 밖에는 없다. 제 딴에는 그래도 꽤 여러번 어떤 곳들에 지원하기는 했었는지,써본적이 적지는 않다. 예전에 공석 하나, 나 한 명 지원한 학교 신문사에 자기소개서를 썼다가 탈락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최근판도 있는데 아직 말할 만큼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고상하게 반기호를 배척하고, 자기소개서까지 기호화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억울해할 이유도 없다. 적당히 신선하면서도 적당히 계몽이 있도록 쓴다고 쓰는데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어차피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면 다음은 체면이라도 차릴 생각이 내심 있다. 혹시나 다음에 또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가 있으면 이렇게 쓸 생각이다. 백전불굴은 내 세상에 없는 단어인데 있기는 할까? 

 

"나는 못났고, 나는 뾰족뾰족 하고, 나는 무례하다는 사실을 최대한 명료하게 말"할 것이다. (오은 풍자시의 변주이다. 원문은 아래에서 확인하라)

 

* 토마스 세벅은 매우 흥미로운 미국 기호학자인데, 이 인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조금더 많은 말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위 주장은 다음 책에 제시된 것이다. "Signs: An Introduction to Semiotics"

* que sais je 문고의 pierre guiraud 가 쓴 "la semiologie" 를 읽어보고 싶은데 구할 방도가 없다. 어둠에서도 밝음에서도.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손석희

2018. 1. 30.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작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한번 씩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죠. 눈앞에 펼쳐진 백지 위에 짧게는 스무 해 혹은 서른 해 가까이 차곡차곡 나름대로 쌓아온 스펙과 인생을 정리해 내보이는 작업입니다.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 오은 < 이력서 >

 

젊은 시인의 말처럼, 그 얇은 백지 안에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추리고 추린 한 장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본디 제품의 사용설명서 라는 의미를 줄여 만든 '스펙' 이라는 그 단어처럼 세상이 원하는 규격화된 기준을 채워야 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타인보다 많은 역경을 극복해왔으며 타인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내보여야 하는 치열한 백지 한 장의 경쟁. 그 두터운 중압감을 무거운 마음을 세상은 헤아리고나 있는 것일까.

오늘 발표된 공공기관 채용비리 최종조사결과는 사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이력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의 이력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간 사람들의 사례는 이미 세상에 넘쳐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저희 JTBC 보도에 따르면 부정이 적발된 이후에도 "이미 합격한 사람을 어찌할 것이냐"는 논리에 따라 그동안 관련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니, 얇은 백지 한 장,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그 한 장을 채워내려 했던 젊음들은 무엇이 정의로운 법칙인가를 세상에 묻고 있었습니다.

 

이력서 쓰기가 특기가 된 이력 위로

그나마의 스펙은 스팸으로 쌓이고,

눈 붉은 불면의 밤은 무겁고도 더디다

- 서숙희 < 원룸시대 >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2015년의 겨울에 앵커브리핑에서 인용했던 문구를 다시 꺼내듭니다. 세 번의 해가 지나간 오늘. 잠 못 이루던 그 젊은이는 갈 곳을 찾았을까. 아니면 오늘밤도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자기소개서를 앞에 두고 눈 붉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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